자기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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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

by forever~♧ 201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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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부터 부산시청 공무원재직 기간<1947 ~ 1982년>

 

본인은 사천시에서 태어나 부산동아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군 생활은 육군 공병학교 교수부 측량 및 설계교관으로 근무 중 국가방위체계인 수도권방위계획에 참여하였습니다.

동아대학 재학 중 한일회담반대운동을 하면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박순천을 사랑하는 모임”의 부산지역 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박순천 국회의원의 비서실장이던 김승목 전 국회의원과 김백용 비서와 계속 접촉하게 되었고 이후 김승목은 제8대,10대,11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비서이던 김백용, 이종수와 ‘대한환경개발주식회사’를 1977년 하반기에 설립하여 회장 김백용, 사장 정창식, 이사 이종수 체제로 1980년까지 폐기물처리의 환경업체인 대한환경개발주식회사를 운영하여 수익금을 조성하였습니다.

 

조성된 자금을 김백용이 신민당 국회의원 김승목과 박순천 국회의원,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민주화운동을 위해 수차례 전달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1억원의 수표에 이서하였음을 이유로 부산지방검찰청에서 국가내란 음모와 형법 제356조 업무상횡령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1980. 12. 3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습니다. 당시 1억원은 신민당사 전세보증금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찰이 신민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이서한 수표가 발견되어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자금을 대준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후 신청인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연관하여 집중 감시와 수사를 받았습니다. 9개월간의 수사과정에서 사회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감시가 병행되었고 대한환경개발주식회사도 강제로 폐업되었습니다. 또한 부산시청과 경남전문대학은 군사독재에 계속 항거한다면 조직을 떠나라고 권고사직을 요구하여 1983년 2월 부산시청과 경남전문대학을 그만두었으며 이후 공채로 부산수산대학(현.부경대학)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시청 공무원으로 근무시 공무원교육원 강사와 동아대·동의대·부산 수산대학교·경남전문대 겸임교수를 함께 병행하여 부산경남지역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도시계획국 및 기획실 설계단 측량 설계를 담당하였으며 부산지하철 1호선에서 4호선 노선을 결정하였고 구덕터널, 만덕터널, 동서고가로, 사직운동장 주변 도로망, 화명정수장, 사상공단 등을 계획하였습니다.

 

2. 부산수산대학 재직기간<1983~1997년>

 

부산수산대학교 교수로 측량학, 도시계획ㆍ교통, 국토계획 등을 강의하며, 부산수산대학교 학생처 처장보, 부산수산대학교 방송주간 교수, 교수협의회회장, 평위원회의장을 역임하였고 문교부 파견교수 선발 시험을 통과하여 일본 쯔꾸바대학에 사회공학과 교환 교수로 1년간

다녀왔습니다. 일본 동경대학 생산기술연구소 객원교수로도 근무하였습니다.

 

KBS와 대시민 안전운전교실 운영․교통사고 반으로 줄이기 캠페인을 전개하여 선진교통문화정착에 힘썼고 MBC라디오 푸른 신호등 컬럼을 9년간 방송하였으며 당시 방송에서 “컨테이너 통과시 도로마모율을 계산해 보니 일반승용차가 9백만번 지나간 것과 같다. 컨테이너가 많이 왕래하는 부산의 경우 도심 통과시 컨테이너세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2만원/1 teu(컨테이너박스 1개)씩 화주가 부담하는 컨테이너 지방목적세를 신설하여 15년간 부산광역시 재정에 매년7,500억원의 세수 증대에 기여하였습니다.

 

세계 최초 교통카드 이론 개발하여 이를 동남은행에 5,000만원에 매각하여 부산에서는 교통카드제도가 최초로 시행되었으며 매각자금으로 당시 36개 시민단체를 연합하여 사)녹색교통운동시민운동본부를 창립하여 보행자 중심의 교통정책 선도와 명절 귀성길 카풀제도를 실시하는 등 선진교통문화운둥을 주도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위천공단반대 시민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하던 중 부산역 광장에서 “낙동강 상류에 염색공단을 설치하는 것은 부산시민을 죽이는 것으로 김영삼 대통령 머리가 썩어서 낙동강 물이 썩었습니다”라고 연설하였던 바 이를 계기로 노태우정권(1988.2~1993.2)에 이어 김영삼 정권(1993.2~1998.2)에서도 대통령모욕죄로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간첩으로 몰아세울 만한 증거가 없자 더 이상 내사할 것이 없다고 보고 검찰로 하여금 어떠한 사유로든 신청인을 구속하도록 지시하였고, 교통영향평가 연구용역의 연구 참여자 및 용역의뢰인 등을 협박하여 일상적인 연구용역의 댓가를 뇌물로 둔갑시켜 신청인을 배임수재로 구속하고자 하였습니다. 1996년 연구용역대금으로 수령한 7,000만원을 교통영향 평가서가 교통영향평가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힘을 써 달라는 사례비조로 받았으며 정창식 교수에게 모든 죄를 씌우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회유하여 이에 굴복한 공동연구원들은 모두 거짓 자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조사과정에서 결코 공동연구원들의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기에 연구원들은 무사하였고 이를 알고 공동연구원 중 서의택 교수는 변호사비용으로 3천만원을 송금해주었고, 재판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오윤표 교수도 진술한 모든 사실들은 검사의 협박에 못이겨 거짓으로 자백하였으며 사실과 다르다고 법정에서 진술번복과 함께 신청인에게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채택되지 않았고 신청인은 1998.11.11 부산지방법원에서 배임수재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및 추징금 6,900만원을 선고받았고 그를 사유로 1997.4.19 수산대학교에서 해임 처분되었습니다. 이후 2004년부터 현재까지 동의대학에서 근무 중입니다.

 

3. <1999년 6월이후~ 현재>

1985년 “부산시 CBD의 공간구조에 따른 보행교통의 개선에 관한 연구 (부산 수산대학 연구보고(자연과학) 제25권 1호, 1985. 6) 논문을 발표하여 경향신문에 보도되면서 장애인 단체의 강의 요청으로 전국 장애인 대상 장애인 편의 증진에 관한 강의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애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장애인 합동결혼식 진행 및 주례, 부산지역 각 구청에 장애인 사단법인 구성을 주도하여 장애인 재활 자립장, 장애인복지관 형성의 기초를 닦았으며 장애인 재활을 위해 1999년 6월 우리나라 최초 사단법인 부산광역장애인체육회를 설립하였고 이를 계기로 대한장애인체육회가 설립되어졌습니다. 이후 2000년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부산 유치 및 행사를 총괄하였고 이로 인해 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또한 2002년 제8회 아ㆍ태 장애인올림픽 경기대회 조직위원, 시민지원 협의회 공동대표를 역임하여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부산경남지역 시민운동에 노력하여 삼성자동차 부산유치, 선물거래소 부산유치, 부산신항만명칭투쟁(진해신항만), 하야리아 미군부대 반환, 위천공단반대 공동대표로 부산시민의 안전한 낙동강 물 공급에 노력하였으며 최근에는 한진중공업의 희망버스반대 공동대표를 맡는 등 지역현안문제 해결(언론 주도)에 앞장서 왔습니다.

또한 부산의 신공항문제․서부산지역 그린벨트 이용 및 해제 문제․환경문제 등의 서부산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부산 최대의 시민단체인 서부산시민협의회의 공동대표를 4년간 역임하였고 현재는 명예회장으로 계속 활동 중입니다.

현재도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 100개 모임의 통합시민지원협의회 공동대표로 사)한국녹색소비자연대 부산지회 현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소비자들이 참여하는 시민단체로서 비영리, 비정부, 비정당 기구로 환경파괴적인 사회경제체로부터 환경 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경제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으며 부산 경남 울산지역 시민단체들과 연대해서 피해 시민들을 구제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등 소비자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봉사차 방문했던 거제시 갈곶이 마을의 경우 국립공원관리법에 의해 건물 신․증축이 불가하여 주민 82가구 중 50가구가 화장실도 없이 다른 집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화장실을 건축할 수 있도록 당시 1억원 정도의 용역금액에 해당하였던 국립공원 변경안 재정비 용역을 무료로 수행하여 거제군․경상남도․건설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에 설명까지 자처하여 국립공원 재정비 변경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마을전체가 취락지구로 지정되어 주민숙원사업을 해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화장실로 인해 겪었던 불편을 안타깝게 여기고 전문지식인으로서 지식을 소외계층과 나눠야겠다는 마음으로 무료로 재정비 변경안 통과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매사에 모든 업무를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민과 대중을 위한 도움이 되는 정확한 기준을 세워 처리하였기에 그동안 수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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