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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3 :: 정창식교수 재심신청사유 [15년만의 양심선언]

정창식 교수 재심 신청사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귀하

재심 신청 사유(추가 제출)


귀위원회에서 제218차에 심의한 정창식(사안번호 11916호)입니다. 저는 70년대 신민당
지원활동과 1980년대 이후 민주화를 위해 신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왔으며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김대중 내란(1980년대 초)과 1996년까지에 이르는 시민운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 불인정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어 추가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재심을 신청합니다.




Ⅰ. 배임수재 유죄판결에 대한 잘못된 처분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신청인을 간첩혐의로 내사하다가 증거를 찾지 못하자 검찰로
하여금 뇌물수수죄로 신청인을 기소하게 하였다.


사건의 내용은 1996년 수영만 반도복합빌딩 등 교통영향평가 연구용역을 서의택, 정헌영,
김태곤 등과 함께 수행하면서 연구용역대금으로 수령한 7,000만 원을 교통영향 평가서가
교통영향평가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힘을 써 달라는 사례비조로 받았다는
사실로 기재하도록 국가안전기획부․ 검찰 등이 함께 연구에 참여했던 관련자와
교통영향평가
의뢰기업 대표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박하였던 것이다. 2011년 초 부산지방검찰청
에서
부산시에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각 기업에서 교통영향평가위원에게 제공한 내역은
일이십만 원의 상품권이었으며, 현실적으로도 교통영향평가위원에게 주는 사례금은
일이십만 원의 상품권에 불과한 실정이다.


검찰은 교통영향평가 의뢰기업 대표 허일도를 조사하면서 기업을 살리겠느냐
정창식에게
송금한 용역대금을 뇌물로 준 것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겠느냐를 선택하도록 하여
허일도는 검찰요구대로 용역대금을 뇌물로 바꾸어 거짓 자백을 하고 풀려났던
것이다.
이후 신청인은 2004년 허일도를 서울지방검찰청에 허위자백 및 위증으로
고소하였으나
미국에서 증인이 입국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검찰은 현재 그 사건을
방치해 두고 있다.



또한 서의택, 정헌영, 김태곤 등 공동연구자들에게도 정창식 교수에게 모든
죄를 씌우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회유하여 이에 굴복한 공동연구원들은 모두 거짓 자백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청인은 조사과정에서 결코 공동연구원들의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기에
연구원들은 무사하였다. 이를 알고 공동참여 연구진 중에서의택은 변호사비용으로
3천만 원을 송금해주었고, 재판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오윤표 교수도 진술한 모든
사실들은 검사의 협박에 못이겨 거짓으로 자백하였으며 사실과 다르다고 법정에서
진술번복과 함께 신청인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증언이 재판과정에서 채택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담당부장검사가
담당 홍광식 판사를 찾아가 정창식을 구속시키도록 특별히 부탁하기도 하였다.
표적수사와 정식재판이 아닌 뒷거래로 구속사안을 부탁하고 결정하는 불법이
자행된
결과로 신청인은 1998.11.11 부산지방법원에서 배임수재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및 추징금 6,900만 원을 선고받았다.






Ⅱ. 1980년대초 김대중 내란음모와 관련 신청인의 활동상황


1. 신청인은 동아대학 재학중 한일회담반대운동을 하면서 국회의원 박순천을
흠모하게
되어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박순천을 사랑하는 모임”의 부산지역 회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박순천 국회의원의 비서실장이던 김승목
전국회의원과
김백용비서와 계속 접촉하게 되었다.


박순천국회의원의 연설은 도산 선생의 민족주의와 같은 맥락이었고 야당 국회의원
이라기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도자였기에 이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박순천국회의원은 정계은퇴후에도 육영수 여사와의 정기적인 만남을 통하여
국정현안에
대한 의견을 많이 전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육영수여사는 청와대에서 야당으로
불리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직언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김승목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신민당)에 당선되어 이후
10대(1979.3 ~ 1980.10),
11대(1981.4 ~ 1985.4)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승목의원의 비서이던 김백용, 이종수와
‘대한 환경개발주식회사’를 1977년 하반기에 설립하여 회장 김백용, 사장 정창식,
이사 이종수 체재로 1980년까지 폐기물 처리의 환경업체인 대한 환경개발주식회사를
운영하여 수익금을 조성하였다.


이와 함께 김승목은 처가 서울 무교동에서 “낙동강”이라는 식당을 운영하여
정치자금을
조성하였고 이 자금과 상기 대한 환경개발주식회사에서 조성된 정치자금을
김백용이
신민당 국회의원 김승목과 박순천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수차례
전달하는 과정에서
신청인이 1억 원의 수표에 이서하였음을 이유로 부산지방검찰청에서
형법 제356조 업무상횡령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1980. 12. 3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당시 1억 원은 신민당사 전세보증금으로 사용되었으며 경찰이 신민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청인이 이서한 수표가 발견되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청인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연관하여 집중 감시와 수사를 받았다.


2. 1979년 10월 부마항쟁 이후 3김의 정치활동재개와 함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새로운
정권창출을 위해 민주세력을 탄압하였다. 이에 신군부의 출현을 막고 민주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신민당 대표로 김영삼을 선택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중도통합론
연설을 담은
녹음테이프와 새로운 신군부 출현을 막기 위한 항쟁 관련 유인물을 부산지역
4개 대학
즉 동아대학, 수산대학, 경남전문대학, 경동전문학교(현동의 대학교)
중심으로 김백용,
이종수, 김차난 등과 공동으로 학생회에 전달하고 배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데모를
위해 대한 환경개발주식회사의 수익금을 학생회에 전달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항거하였다.



3. 1980년 1월경 서울에서 먼저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수사가 시작되면서
부산에도 수사가
시작될 것으로 보고 위협을 느껴 사직동 김백용 자택지하실에서 신군부타도
유인물과
김대중 연설 녹음테이프를 불살라 흔적을 없앴다. 이후 김백용 부부,
이종수외 관련자
20여 명의 도피과정에서 자금과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노력하던 중
신청인이 제1호로 구속영장없이 불법으로 경찰청 기동대 사무실 유치장에
구속되었으나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한 달 후 불구속조치되었다. 불구속기소된 후 검찰은
신청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담당검사를 부장검사로 변경하면서 불구속 상태에서
계속 추가로
수사하여 대한 환경개발주식회사에 대한 업무상 횡령혐의로 신청인을 기소하였다.


4. 당시 신청인은 부산시청과 경남전문대학 토목공학과 전임강사 재직중이었으나
9개월간의 수사과정에서 사회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감시가
병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한 환경개발주식회사도 강제로 폐업되었고 부산시청과
경남 전문대학은
이유없이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계속 항거한다면 조직을
떠나라고
권고사직을 요구하여 1983년 2월 부산시청과 경남전문대학을 그만두었다.
이후 공채로
부산 수산대학(현. 부경대학)에 근무하게 되었다.







Ⅲ. 1996년까지 이르는 신청인의 독재에 대한 항거활동

1. 1983년 수산대학에서 방송 주간 교수를 맡으면서 신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학내방송에서 선구자, 임을 위한 행진곡 등 노동운동가들을 방송하게
하였다.
1985~1986년 학생부 과장(현 학생부처장)을 맡으면서 학생들을 다각도로
지원하였다.
1987년 6․29선언 이전까지 계속된 학내 민주화시위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경찰서에
연행되자 학생들이 구속되지 않도록 검찰과 경찰을 접촉하여 변호사 선임문제와
선처를
부탁하고 학생신변을 인수하고, 학생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등 학생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1987년 6․29선언까지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간첩혐의를 가지고 신청인을
계속
주시하였고 수시로 수산대학교 연구실을 찾아와 최근 활동에 대한 탐문뿐만 아니라
도청도
자행하였다.
관할 남부경찰서에서도 정보과 2계 소속 이 금광경장은 신청인의 동향을
국가안전기획부에
주기적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2. 1988년부터 1996까지 MBC라디오 푸른신호등 교통 칼럼을 진행하면서
교통정책뿐만
아니라 도시발전과 공정한 사회질서확립에 대한 정부정책의 무능함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결과 두 번이나 방송진행에서 퇴출되었으나 그때마다 MBC방송국 노조에서
신청인의 복귀를
요구하여 다시 방송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1992년 12월 동서고가도로 준공식에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비난한
이유로 괘씸
죄에 걸려 국가원수 모독죄 대신 간첩혐의로 내사하게 되었다. 그 비난 내용은
MBC라디오
푸른신호등 생방송(담당: 오명식아나운서)에서 “당초 동서고가로 건설당시
컨테이너
수출입물동량의 내륙수송 담당도로이므로 국비 250억 원을 지원한다고
부산시에 약속했으나
이를 어기고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국정에 바쁜데 왜 준공식에
참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방비로 건설된 도로 개통식날 시민들이 참여하는 걷기대회, 마라톤행사
등을 해야지 바쁜 대통령이 왜 오는가”라고 한 것이었다.


이 내용을 들은 국가안전기획부 담당 수사관이 수산대학 연구실에 와서
대정부 비판을
많이 해서 부산경제살리기 시민대표 박인호와 신청인에 대해 다시 간첩혐의
내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신청인은 굴하지 않고 동서고가도로 개통후 설치된 준공기념비의
대통령 노태우 이름위에 콜탈액을 사용하여 이름을 지웠다.




3. 1995년 위천공단반대 시민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하던 중 부산역 광장에서
“낙동강 상류에
염색공단을 설치하는 것은 부산시민을 죽이는 것으로 김영삼 대통령 머리가 썩어서
낙동강
물이 썩었습니다”라고 연설하였던 바 이를 계기로 노태우 정권(1988.2 ~ 1993.2)에 이어
김영삼
정권(1993.2 ~ 1998.2)에서도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간첩으로 몰아세울 만한 증거가 없자 더 이상
내사할 것이
없다고 보고 검찰로 하여금 정창식을 구속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학교강의
외에도
교통영향평가 등 연구용역을 수행하는 것에 착안․연구참여자 및 용역의뢰인 등을
협박하여
일상적인 연구용역의 댓가를 뇌물로 둔갑시킴으로써 신청인을 구속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후 수사가 시작되면서 신청인은 도피생활을 감행하여 피해 다니다
1998년 2월 정권이 바뀌는
시점에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도 받았고 신청인의
전력(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도
있고 해서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전날
자수하였으나
곧바로 영어의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 국가안전기획부의 모략으로 신청인은 1998.11.11
부산지방 법원에서
배임수재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및 추징금 6,900만 원을 선고받았으며
그를 사유로
1997.4.19수산대학교에서 해임 처분되었다.

posted by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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